2013년 4월 24일 수요일

주세페 메아차


유년 시절과 기술적 재능

그는 모든 그의 선수 경력을 중앙 공격수로 보냈지만, 그의 기술과 재능은 뛰어난 미드필더로도 손색이 없었기 때문에 선수 경력의 반 이상을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활약하였다. 그는 탁월한 슈팅 능력과 숨막히는 드리블 기술과 패스를 보는 눈, 키는 그다지 큰 편은 아니였으나 뛰어난 헤딩 능력을 가진 위대한 리더였다.
그의 별명인 'il Balilla'는 그가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활약했을 때의 고참 선수였던 레오나르도 콘티가 붙였다. 'Pepp'이란 별명은 콘티의 자리를 대신하여 메아차가 17살이란 매우 어린 나이에 성인 무대에서 데뷔를 하도록 결정한 아르파드 웨이즈가 붙여줬다. 당시 콘티는 "우리는 이제 유치원에서 선수를 데려올 거야!"라고 풍자적으로 외쳤다. 8살에서 14살까지의 어린이들을 모은 오페라 나치오날레 바빌라란 파시스트 유소년 조직이 1926년에 설립하였기 때문에 콘티는 이를 신인 선수를 묘사하기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었다. 메아차는 코모에서 펼처진 코파 볼타 밀라네스 우니오네 스포르티바전에서 2골을 넣으면서 팀이 6-2로 승리하는데 기여하면서 강렬한 데뷔전을 치루면서 전임자였던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의 콘티를 말을 잃게 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인 메아차의 공식 데뷔전인 1927년 9월 12일의 이탈리안 챔피언쉽에서 그렇게 자주 일어나진 않았지만 콘티는 그의 경기를 '지능적이고, 신선하고, 빠르다'라고 칭찬하였다.
메아차는 밀라노의 포르타 비토리아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7살 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였으며, 그는 어머니의 손에서 길러졌다. 메드글리아에서 온 에르실리아가 그의 어머니가 과일을 파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가 축구를 시작한 이유가 된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신발은 숨겼으며, 그로 인하여 그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맨발로 축구를 시작하는 이유가 된다. 그는 6살 때 거리에서 '마에스트리 캄피오네시'라는 팀에서 넝마 조각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마침내 12살 때 그는 그가 추구하는 축구선수의 꿈을 어머니께 허락받았으며, 그리고 글로리아 FC에서 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팬이 그에게 처음으로 그에게 맞는 축구화를 사준 곳이기도 하다.
메아차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첫번째 이탈리아 축구선수이며, 또한 처음으로 개인 후원사까지 생긴 사람이다. 그는 그의 쿠페 자동차, 샴페인, 여자들을 좋아했으며 또한 유일하게 흡연이 허용된 대표팀 선수였다. 메아차는 당시의 뛰어난 수비수들에게 굴욕을 준 것과 경기 시작전에 매춘굴에서 잠을 잔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의 축구화가 공에 닿는 순간, 그는 뒤에서 나오면서 양발태클을 하는 시대의 건장한 수비수들에게 공포의 원인이 되었다. 때때로 그는 그의 팀 동료들이 연습을 다 끝낼 때까지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또한 그는 탱고를 좋아했는데 이를 이용하여 폭스-트렛 템포를 타면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골을 넣을 수가 있었다. 그는 훌륭한 드리블을 가졌는데, 그의 속력에도 불구하고 머리의 젤이 잘못 놓이는 일이 없었다. 또한 그는 키가 크지 않았지만 현저하게 공중전에서도 우위를 보였다. 메아차는 그의 팀 동료들에게 많은 기회를 만들어줬으며 또한 골도 그만큼 많이 기록하였다. 그의 골인 'a foglia morta', '낙엽 기술'은 골키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양발과 주목할만한 시야, 유명한 터닝 기술로 뛰어난 패스 실력을 가진 것으로도 알려져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 골은 하프라인에서 공을 잡아 춤추듯이 잰 걸음으로 상대팀 선수들을 드리블로 뚫고 나가 공이 앞에 오기 전까지 몸을 돌린 후에 잠깐 멈춰 투우에서 창을 찔러 소를 죽이려는 투우사처럼 골키퍼를 불러내어 슈팅 동작으로 속인 후 드리블로 속아 넘어간 골키퍼를 앞서나가 쉽게 골문에 넣었다. 원정 경기에서는 수비수들은 자주 반칙을 했으며 굴욕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정강이를 차기도 했다. 'Gol alla Meazza'와 'finte alla Meazza'란 말은 남을 속이기 위한 방법들이나 드리블로 벗어나 매우 고무적인 골을 넣는 모습으로 이탈리아 축구 팬들에게 유명한 말이 되었다. 그의 골들은 'ad invito'라고 그가 골키퍼들을 불러내어 드리블로 그 주위를 돌파하는 방법으로 아직도 유명한 말이다. 메아차는 '속임수를 알지 못 하고 얻어낸 페널티 킥을 막아내는 골키퍼들보다 나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이탈리아가 월드컵 2연패를 했을 때의 지도자인 비토리오 포초는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공격수로 태어났다. 그는 경기를 보고, 상황을 이해하며 조심스럽게 공을 배급하며 공격 작업을 만들어낸다. 그가 팀에 있는 것은 1:0인 상태에서 경기를 시작하는 것과 같다.'
지아니 브레라는 메아차를 'il Folber'라고 불렀으며 메아차의 경기 스타일은 'fasso-tuto-mi'라고 했다. 그는 메아차를 완성된 중앙 미드필더와 재치가 풍부한 곡예사로 생각했다. 브레라는 메아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브라질인과 아르헨티나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두드러지는 이탈리아인이다."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가능한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클럽의 좋은 시기인 1963년의 인테르나치오날레의 부회장인 페피노 프리시코는 "때때로 아주 불쾌한 위기들이 그의 미칠듯한 성적 행위들과 경기에 대한 열정들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메아차는 위대했으며, 무적이었다. 그가 경기장을 접수하면 그는 입이 벌어질만한 것을 남겨준다."
AC 밀란에서 그와 같이 뛰었고 나중에 감독이 되는 브루노 아카리 4세는 "메아차는 전술에 대해 듣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한 사람으로 그가 페널티 박스 안에 있을 때 그는 왕이 되었다. 그의 기술적 능력은 펠레와 비교되었다."
그의 고향 밀라노의 으뜸가는 경기장이며 도시 라이벌인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 AC 밀란이 같이 쓰고 있는 경기장인 산 시로는 그를 기리기 위해 공식적으로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로 불리고 있다.

문화 속의 인테르나치오날레


문화 속의 인테르나치오날레

나라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 중 하나로 인테르나치오날레는 축구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문화에서도 두드러졌다.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선수였던 브루노 볼치는 처음으로 인쇄된 '파니니 칼치아토리(Calciatori Panini)의 주인공이었다.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선수들은US 팔레르모 선수들과 함께 처음으로 스포츠 매체인 '라 도미니카 스포르티바'에 출연하였다. 이 날짜는 1954년 1월 3일로 같은 날 RAI-이탈리아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공식적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1960년대엔 자발적으로 첫 서포터즈들이 만들어짐에 따라 세계 최초로 시즌 티켓을 경기장에 도입하였다.[32] 1995년 7월 30일에는 이탈리아 클럽 최초로 홈페이지인 Inter.it.이 개설되었다. 15년 뒤인 2010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방문자가 많은 축구 클럽 홈페이지와 이탈리아 스포츠에서 두 번째로 방문자가 많은 홈페이지가 되었다.[33] [34]
인테르나치오날레는 'Eccezzziunale... veramente'[35]와 같은 많은 영화들과 연관되어왔다. 이의 속편인 'Eccezzziunale... veramente - Capitolo secondo... me'[36]에서는 디에고 아바탄투오노가 인테르 팬인 프랑코 역을 맡았고, 그의 친구와 대화하는 도나토 카발로는 AC 밀란 팬을 맡았다.(아바탄투오노에 대비되는 역) 여기서 그는 3년 뒤에 틀렸음이 증명되는 '인테르나치오날레는 절대 4회 연속해서 우승하지 못 할 것이다'라고 놀렸다. 다른 영화로는 'A due calci dal paradiso'로 두 청소년이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선수가 되고, 코메디 영화인 'Paulo Roberto Cotechiño centravanti di sfondamento', 그리고 인테르나치오날레가 자주 인용되는 'L'allenatore nel pallone'와 'L'allenatore nel pallone 2'가 있다.
가장 중요한 영화는 알베르토 도노프리코가 만든 전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주장 자친토 파케티에게 헌정된 'Mostra Internazionale d'Arte Cinematografica di Venezia nel 2007'가 있다.[37]
인테르나치오날레와 선수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에서도 언급된다. 아드리아노 셀렌타노의 'Eravamo in 100.000 '와 루시아노 리가부에가 가브리엘 오리알리에게 헌정한 'Una vita da mediano', 리카르도 페리와 그의 자책골 기록이 인용된 'Hai un momento Dio?'와 'A che ora è la fine del mondo?'과 같은 곡이 있다.

인터밀란 서포터와 라이벌 구단


서포터와 라이벌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에 모인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서포터들
인테르나치오날레는 이탈리아에서 서포터가 가장 많은 팀들 중 하나이다.[30]
역사적으로 인테르나치오날레는 노동자들 대다수와 이탈리아 남부 이민자들의 응원에 AC 밀란과 반대로 중산층과 부르주아지들의 지지를 받았다.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전통적인 서포터들은 보이스 산(Boys San)으로, 1969년에 설립된 이들이 일반적으로 이들이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에 서포터의 역사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다. 정치적으로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서포터들의 성향은 보통 우파로 생각하고 있으며 SS 라치오의 서포터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주요 서포터인 보이스산 뿐만 아니라, 비킹그(Viking), 일리두치빌리(Irriducibili), 울트라스(Ultras), 브리안차 알콜리카(Brianza Alcoolica)와 같은 4개의 거대한 서포터스 그룹 역시 존재한다.
2007년 15번째 우승을 축하하는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서포터들
2008-2009 시즌의 쿠르바 노드
인테르나치오날레의 팬들 중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들은 쿠르바 노드,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의 북쪽 자리로 모인다. 인테르나치오날레를 응원하기 위하여 배너를 펴고 기를 흔드는 등 오랜 전통들을 쿠르바 노드가 주도해왔기 때문에 그들은 팀의 가장 끝까지 버티는 서포터들과 동의어가 되었다.
인테르나치오날레에게는 많은 라이벌들이 존재한다. 같은 도시를 연고로 하기 때문에 데르비 델라 마돈니아라고 부르는 경기의 상대 팀인 AC 밀란이 대표적인 라이벌이다. 이들은 인테르나치오날레가 1908년에 떨어져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더비 의 이름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마리아를 언급한 것으로 밀라노 대성당 꼭대기에 그녀의 동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기는 보통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며 종종 웃기거나 공격적이기도한 다수의 배너가 걸린다. 폭죽도 일반적인 응원도구이지만, 4월 12일 UEFA 챔피언스리그 2004-05 AC 밀란과의 8강전 2차전 경기에서 관중석에 있던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서포터가 던진 폭죽이 밀란의 골키퍼 지다의 어깨에 떨어지면서 경기를 더이상 할 수 없었고 결국 몰수패를 당해야만 했다. [31]
또 다른 라이벌로 유벤투스 FC가 있는데 이들과의 경기는 데르비 디탈리아로 불린다. 2006년 칼치오폴리로 유벤투스가 강등되기 전까지 이 두 클럽은 한 번도 강등되지 않은 팀이었다.
칼치오폴리 이후, 인테르나치오날레는 AS 로마와 우승 경쟁을 하면서 라이벌이 되었다. 이들은 인테르나치오날레가 2005년에서 2010년까지 세리에 A를 5연패할 때 4번이나 준우승을 차지했다. 2006년 이후로 양 팀은 5번이나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 만났으며 또한 4번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경기를 갖기도 했다.
이 외에 같은 검정, 파랑 줄무늬를 사용하는 아탈란타 BC, 그리고 SSC 나폴리와 같은 클럽들과도 라이벌 관계에 있다.

주세페 베르고미

주세페 베르고미(이탈리아어: Giuseppe Bergomi1963년 12월 22일 ~, 이탈리아 밀라노)는 1963년 밀라노 출생의 이탈리아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선수 시절의 모든 경력을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수비수로 활약하였다. 포지션은 라이트 풀백과 중앙 수비수였으며, 등번호는 2번이었다. FIFA 월드컵에는 1982년1986년1990년1998년 등 4회나 참가하였으나,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는 1988년에 참가한 것이 유일하다

하비에르 아델마르 사네티(


하비에르 아델마르 사네티(Javier Adelmar Zanetti, 1973년 8월 10일부에노스아이레스 도크 수드 ~ ) 는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로, 현재 세리에 A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소속이다. 사네티는 1995년 이래로 인테르 소속이었고,1999년 8월 29일을 기점으로 팀의 주장이 되었다. 그는 다재다능하며, 왼쪽과 오른쪽 모두 윙어로 뛸 수 있으며, 양쪽 모두 윙백풀백으로도 뛸 수 있다. 그 외에도 다른 미드필더 포지션으로도 기용 가능한데, 특히 중앙이나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될 때에는 더욱 돋보인다. 국가대항전에서, 그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출장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1996년 하계 올림픽 축구 토너먼트와 1998년 FIFA 월드컵2002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하였다.
모국에서 "푸피" (Pupi) 로 알려졌으며, 사네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으로, 파워, 탄력, 스태미너, 그리고 윙백으로공격 가담시 수비를 넘는 동작으로 인해 "트랙터" (El Tractor) 라는 별명을 이탈리아로 갓 이적했을때 얻었다. 최근에 그는 주로 우측 미드필더로 기용된다.[1] 그는 2006년 11월 5일, 득점을 기록하며 4년 무득점 침묵을 깼다.[2] 국가대표팀에서, 그는 라이트 백으로 기용되며, 공수전환에 유연하다.
사네티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소속으로 세리에 A를 5회 우승 하였고, 팬들과 언론으로부터 그가 팀의 주장이 된 뒤 "캡틴" (Il Capitano) 라는 별명을 획득하였다. 그는 비이탈리아 출신으로 이탈리아 클럽의 경기에 출전한 선수로, 인테르의 757번의 공식 경기에 출장하였다. 사네티는 인테르에서 은퇴하기를 희망하며, 그 후에도 인테르와 함께하기를 원한다. 사네티는 자선 활동을 하는 것도 알려져 있으며, 아르헨티나의 불우 아동을 위한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FIFA로부터 SOS 아동 마을 프로젝트의 대사로 선정되었으며, 밀라노의 시청으로부터 암브로지노 도로 (Ambrogino d'Oro) 를 얻었다. 사네티는 특수 올림픽의 국제 대사 중 하나다.
2010년 5월 22일2010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사네티는 인테르 700번째 공식 경기를 기록하였고, 이 날밤 승리를 거둔 인테르는 역사적인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2010년 10월 20일, 그는 토트넘 홋스퍼 FC 전에서 득점하여, UEFA 챔피언스리그 최고령 득점 선수로 기록되었다. (37세 71일) 이 기록은 필리포 인차기와 라이언 긱스가 보유하고 있었다.

인터밀란 역대 감독


역대 감독

라 그란데 인테르 시대를 이끌었던 엘레니오 에레라
인테르나치오날레를 이끌고 트레블을 한 주제 모리뉴
2012년 현재까지 안드레아 스트라마키오니까지 포함하여 59명의 감독들이 인테르나치오날레를 거쳐갔다. 첫번째 감독은 비르질리오 포사티였으며, 가장 오랫동안 계약한 사람은 9년동안 계약했었떤 엘레니오 에레라이다. 그의 감독하에 인테르나치오날레 3번의 스쿠데토, 2번의 유러피언 컵, 2번의 인터콘티넨탈 컵을 들어올리면서 성공적인 시간을 보냈다.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또 다른 성공을 가져다준 감독은 2년간 계약을 하였던 조제 모리뉴로 첫 해에는세리에 A 정상에 올랐으며, 두 번째 해에는 이탈리아 팀 최초로 트레블을 하였다.
 
이름국적연도
비르질리오 포사티이탈리아1909~1915
니노 레세아티 이탈리아1919~1920
밥 스포티쉬우드잉글랜드1922~1924
아르파드 베이즈헝가리1926~1928
요셉 비올라헝가리1928~1929
아르파드 베이즈헝가리1929~1931
이시트반 토드이탈리아1931~1932
아르파드 베이즈헝가리1932~1934
지울라 펠드만헝가리1934~1936
알비노 카라로헝가리1936
아르만도 카스텔라치이탈리아1936~1938
토니 카르그넬리오스트리아1938~1940
주세페 페르게티이탈리아1940
이탈로 잠베르레티이탈리아1941
이보 피오렌티니이탈리아1941~1942
조반니 페라리이탈리아1942~1945
카를로 카르카노이탈리아1945~1946
니노 누트리치오이탈리아1946
주세페 메아차이탈리아1947~1948
카를로 카르카노이탈리아1948
다이 아스틀레이웨일스1948
지울로 카펠리이탈리아1949~1950
알도 올리베이리이탈리아1950~1952
알프레도 포니이탈리아1952~1955
알도 캄파텔리이탈리아1955
주세페 메아차이탈리아1955~1956
아니발레 프로시이탈리아1956
루이지 페레로이탈리아1957
주세페 메아차이탈리아1957
제세 카버잉글랜드1957~1958
주세페 비고그노이탈리아1958
알도 캄파텔리이탈리아1959~1960
카밀리오 아칠리이탈리아1960
지울로 카펠리이탈리아1960
 
이름국적연도
엘레니오 에레라아르헨티나1960~1968
알프레도 포니이탈리아1968~1969
에리베르토 에레라파라과이1969~1971
조반니 인베르니치이탈리아1964~1965
에니아 마시에로이탈리아1973
엘레니오 에레라아르헨티나1973
에니아 마시에로이탈리아1974
루이스 수아레스스페인1974~1975
주세페 키아펠라이탈리아1976~1977
에우제니오 베르셀리니이탈리아1977~1982
리노 마르케시이탈리아1982~1983
루이지 라디세이탈리아1983~1984
일라리오 카스타그네르이탈리아1984~1986
마리오 코르소이탈리아1979~1980
조반니 트라파토니이탈리아1986~1991
코라도 오리코이탈리아1991
루이스 수아레스스페인1992
오스발도 바그날리이탈리아1992~1994
지암피에로 마리니이탈리아1994
오타비오 비안키이탈리아1994~1995
루이스 수아레스스페인1995
로이 호지슨잉글랜드1995~1997
루시아노 카스텔리니이탈리아1997
루이지 시모니이탈리아1997~1998
미르체아 루체스쿠이탈리아1998~1999
루시아노 카스텔리니이탈리아1999
로이 호지슨잉글랜드1999
마르첼로 리피이탈리아1999~2000
마르코 타르델리이탈리아2000~2001
헥토르 라울 쿠페르아르헨티나2001~2003
코라도 베르델리이탈리아2003
알베르토 자케로니이탈리아2003~2004
로베르토 만치니이탈리아2004~2008
조제 무리뉴포르투갈2008~2010
라파엘 베니테스스페인2010
레오나르두 아라우주브라질2010~2011
잔 피에로 가스페리니이탈리아2011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이탈리아2011-2012
안드레아 스트라마키오니이탈리아2012-

[편집]역대 주장